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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미륵반가상 얼굴 바꾼 진짜 이유… 한국산 감추려는 일본의 만행 식민사관


목조미륵반가상 얼굴 바꾼 진짜 이유… 한국산 감추려는 일본의 만행
 
2010/02/22 [10:39]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
 
김영조·이윤옥 기자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이하, 미륵상)의 얼굴이 수리되었으며 그것도 수리 전과 수리 후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는 말을 한 사람은 일본 미술사학자 나가이 신이치 교수이다.

고대 조선인이 만든 일본 국보 제1호 미륵상은 오래전부터 여러 논쟁 속에 휘말려 왔다. <일본서기> 등 역사적 문헌은 “신라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하여 이 불상이 신라인의 작품임을 증언하고 있지만 이를 두고 일본쪽 학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계속 하면서 이 미륵상은 고대조선인이 만든 것이 아님을 필사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간 일본 학자들 사이에 있어 온 논란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1) 누가 만들었나? 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

2) 재질이 무엇이냐? 적송(아까마츠)이냐? 녹나무(구스노키)냐?

그럼 먼저 불상 제작자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자.

광륭사 반가상 제조국 논란

이 미륵상은 일본서기에 신라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했으므로 한국산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일본 학자들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다만, 만든 나라가 신라냐 백제냐에는 이견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홍윤기 교수의 ‘홍윤기의 역사기행<79> 교토 고류지’ 글을 인용해서 정리해본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현존하는 미륵상의 양식은 신라계의 것이며, 신라에서 보내준 불상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라고 증언했다. 그 밖에 히라노 구니오(平野邦雄) 교수·미스자와 스미오(水澤澄夫) 교수·미즈노 세이치(水野淸一) 교수 등은 “적송 미륵상은 신라에서 보내준 것이며, 한국 국보 제83호인 금동반가상과 똑같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불상이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주장도 있음을 홍윤기 교수는 소개하고 있다.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와 도쿄교육대학 미술사학과 마치다 고이치(町田甲一) 교수는 공저에서 “미륵상은 광륭사 사찰 기록에 따르면 스이코왕(592∼628) 11년(603)에 백제에서 보냈다”라고 한다. 또한, 고니시 아키오(小西秋雄)도 미륵상은 백제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미륵상을 둘러싼 논쟁 중의 하나인 신라산이냐 백제산이냐는 학자마다 주장하는 바가 팽팽히 맞서 좀더 시간이 걸려야 정리될지 모른다. 다만, 아직도 일부 학자들이 일본산이라고 억지스런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 미륵상은 신라 또는 백제 중 한 나라에서 건너간 불상이며 만든 곳이 한반도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여기서 재미난 사실 하나를 소개하겠다. 미륵상의 얼굴 개조 사실을 밝힌 미술사학자 신이치 교수의 경우이다.

이 사람은 1976년 <역사공론> 6월호 ‘아스카불에 보이는 일본과 조선’에서 말하기를 “미륵상은 조선인이 조선 땅에서 만들어 가지고 왔다기보다는 조선인 1세대쯤 되는 사람이 일본 땅에 와서 일본 재료인 적송으로 만든 것 같다”라고 했다가 30년이 지난 2006년 7월 ‘일본·아시아 미술 탐색’에서는 많이 누그러진 자세로 “조선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가져왔다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끝을 흐리고 있다.

일본에는 고대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많은 불상과 문화유산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감추거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이유를 달아 “일본 것”으로 둔갑시키고자 하는 일부 학자가 있다.

또 그들은 어정쩡한 표현으로 말 돌리기도 예사다. 가령 “이 미륵상은 신라 불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라서…” 뭐가 어떻다는 것인지… 이런 말꼬리 흐리기 작전에 넘어가면 안 된다.

불상 재질 따라 제조국도 달라

그간 일부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 미륵상’을 일본인이 만든 것으로 둔갑시키려고 상당한 논문을 쏟아냈다. 신이치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광륭사 미륵상을 만든 사람이 고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불상 재료이다.

1951년 고하라 지로(小原次郞) 교수가 발표한 한 편의 논문은 종래의 일본제작설을 일시에 잠재웠다. 그는 ‘上代조각 재료 사적고찰’ (불교예술 13호. 1951년, 일본)이란 논문에서 7, 8세기 일본 불상들은 녹나무인 데 비해 미륵상의 재질은 적송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700여 불상의 나무 재질을 연구한 사람으로 이 분야에서는 최고 권위자이다.

정리해보면 “일본에서는 불상 재료로 적송이 안 쓰인다”가 중요한 결론이다. 고하라 교수 자신은 한국에 두 번이나 방문하여 한국의 소나무 재료를 연구한 결과 이런 결론에 확신을 했다면서 이 책에서 ‘적송=조선’ 등식을 확인해주고 있다.

신이치는 그의 논문에서 미륵상 얼굴 수리 이야기를 비교적 정확하고 솔직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미륵상의 진실’을 밝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얼굴이 개조되어 기쁘다”를 말하고자 함이었다. 미술사학을 전공한 신이치의 ‘미륵상 얼굴성형’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한다.


신이치의 주장

� 미륵상은 명치 때에 수리했다.

� 수리 이전에는 분명히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 얼굴 수리 이후 일본인의 얼굴에 가까워 일본인의 사랑을 많이 받게 되었다.

� 얼굴 수리 전에 모양을 본떠 도쿄예술대학에 보관하고 있다.

� 얼굴에 손을 가했다고 해서 문화유산의 가치가 손상된 것은 아니다.

 

문 제 점

� 정확한 연월일을 밝히지 않았다.

� 어떠한 상태이기에 수리를 하게 되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 얼굴을 완전히 바꾼 것이 잘된 일이라는 것인가?

�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을 떠서 어떤 상태로 보관하고 있는지에 대해 언급이 없다.

� 문화유산 수리 시에는 원형복원이 상식인데도 문화유산의 가치 손상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신이치는 ‘아스카불에 보이는 일본과 조선’이란 논문에서 미륵상이 원만히 수리되었으며 아주 흡족하다고 했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불상 얼굴 개조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일본 국보 제1호 미륵상은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명치시기에 얼굴 수리를 했다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얼굴로 바뀌었다. 이런 신이치의 주장을 보면 광륭사 미륵상은 얼굴이 성형 수술된 것이 분명하며, 그것도 한국인의 얼굴에서 일본인의 얼굴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다음 사진을 한번 보자.

오른쪽 사진은 미의 비밀 <美の秘密…二つの彌勒菩薩像>이라는 책에 나오는 수리 전의 미륵상 모습이다. 사진으로 볼 때 얼굴 모습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뺨 부분도 도톰한 게 역력한 한국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왜 얼굴에 손을 댔을까? 만일 얼굴 손상이 있었다면 정확한 손상 정도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피치 못해 복원을 하는 경우에도 이 사진을 토대로 얼굴 손상을 최대한 줄이면서 복원했어야 한다.

이 미륵상에 대한 복원이야기를 다룬 책이 <美の秘密…二つの彌勒菩薩像>이다. 이 책은 1977년 2월11일 NHK 교양 특집 ‘미의 비밀’의 하나로 다룬 내용이다.

위 사진 속 미륵상 얼굴 앞에서 100여 년 만에 얼굴수리를 재현해 보이는 사람은 도쿄예술대학 교수 니시무라 코쵸(西村公朝)다. 그러나 이날 방송을 책으로 묶은 원고 어디에서도 불상 얼굴의 손상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신이치는 위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명치시대에 이 상(불)은 수리되었으나 그때 수리에 손을 대기 전에 두부(얼굴포함 머리)의 형(型)을 떠놓은 것이 도쿄예술대학에 보존되어있다.(明治時代にこの像は修理されたがそのとき修理の手をくだす前に像の頭部を型にとったものが東京の芸大に保存されている。)

그렇다면 보존되어 있는 수리 전 얼굴형을 공개해야만 얼굴 성형에 대한 의심이 풀릴 것이다.

목조반가상 성형 이유 공개해야

우리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광륭사! 이곳에 가는 목적은 단 한 가지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을 보러 가기 위함이다. 이 불상은 알려진 대로 고대 한국인이 만든 불상이라 더욱 애틋하고 국보 제1호라 더욱 관심을 갖는 불상이다.

이러한 지상 최고의 한국불상이 한국인의 얼굴에서 일본인의 얼굴로 개조되었다는 사실을 ‘광륭사’ 안내책자와 누리집에는 단 한 줄도 밝히지 않고 있다. 국내 인터넷에 올라 와있는 글 그 어디에도 이런 내막을 알리는 내용이 없다.

미륵상에 관한 취재된 글 중에 제주인터넷뉴스 ‘일본속의 한민족 취재(3) - 광륭사’ 장영주 칼럼 기사에는 “교수님의 강의에 미술을 전공하는 일본의 어느 대학생이 목재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감상하다가 너무나 매혹되어 달려가 껴안으려다가 결국 불상의 손가락 하나를 부러뜨리는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는 구절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1960년 교토대학의 20세 학생이 일으킨 사건 곧 미륵상이 매우 아름다워 그만 자신도 모르게 껴안다가 미륵상 손가락을 부러뜨린 사실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이를 대서특필했다. 유감스럽게도 당시는 한일수교 전이라 몰랐던 것인지 한국 언론은 보도하고 있지 않다. 다만, 손가락이 부러진 이 사건이 많은 누리꾼 사이에서 대단한 것인 양 인용과 재생산이 무한히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손가락 부러진 사건은 확연히 얼굴을 개조한 사건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이 중요한 사실 곧 미륵상 얼굴 개조 사실에 대해 여태껏 확인도 안 해보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쥱 도쿄예술대학에 본떠 놓았다는 미륵상의 수리 전 모습을 공개하는 것이 마땅하다.

쥱 수리 전과 수리 후의 모습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과정이 공개되어야 한다.

쥱 이 미륵상 외에 다른 문화유산도 이렇게 손을 댄 것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

쥱 광륭사는 미륵상의 얼굴 성형 사실을 분명히 안내책자에 넣어야 한다.


【참고문헌】

1. <美の秘密…二つの彌勒菩薩像>小原二郞 外 5人, 日本放送出版協會, 1982

2. <日本·アヅア美術探索-(世界美術雙書)> 永井信一/中森義宗/小林忠/靑柳 , 2006

3. <飛鳥佛にみる日本と朝鮮> 歷史公論. 1976. 6

4. <古代日本と佛敎の傳來> 永井信一·田村圓澄 外, 雄山閣出版, 1981

5. <半跏像の道> 田村圓澄, 學生社, 1983

6. <秘佛開眼> 西村公朝, 淡交社, 1976

7. <半跏思惟像の硏究> 田村圓澄·黃壽永, 吉川弘文館, 1985

8. <秘佛> 久野建, 學生社, 1978

9. <京都の佛像> 塚本善隆. 淡交社, 1968

10. <定本佛像> 望月信成, 日本放送出版協會, 1971

11. <正倉院の謎> 由水常雄, 學燈社, 2007

12. <반가사유상> 황수영, 1992, 대원사

13. <한국인이 만든 일본 국보> 홍윤기, 문학세계사, 1995

14. 일본 위키피디어: http://ja.wikipedia.org 외 다수 사이트

15. 한국 네이버, 다음 사이트 외 다수

16. <廣隆寺> 광륭사 절 팜프렛, 32쪽 日本 便利堂, 2009


식민사관 ‘삼국사기 초기기록 허위론’ 교과서에 그대로 식민사관

식민사관 ‘삼국사기 초기기록 허위론’ 교과서에 그대로



[한겨레]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⑥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나?

한국 사학계 주류의 정설(定說) 중의 하나가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현행 <국사교과서>에 삼국의 시조가 누락되어 있는 것도 이런 사관의 반영이다. 제7차 교육과정 이전의 <국사교과서>는 부록의 ‘역대 왕조 계보’에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도 삭제했었다.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53~146)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부터, 신라는 한술 더 떠서 제17대 내물왕(356~402)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하고 있었다.

“임나일본부 얘기 없어 조작 사료”

조선사편수회 쓰다 소우키치 주장에

부정확한 ‘동이열전’ 그대로 수용

주류학계, 교과서에서 삼국시조 빼


<삼국사기>는 신라의 건국연대를 서기전 57년,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으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믿겠다는 것이었다. 7차 교과과정의 <국사교과서> 부터는 그 이전 왕들의 재위연대도 수록했지만 주류 사학계가 자신들의 고대사 인식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넣은 결과가 아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육부 관료들이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강력히 요구한 결과 마지못해 수용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초기 왕들의 재위연대를 누락시킨 채 인쇄했던 일부 <국사교과서>를 폐기 처분하는 소동까지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교육부 관료들보다 저차원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동을 거쳐 현행 <국사교과서>의 부록에는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가 들어갔지만 본문 서술에서는 여전히 초기 국왕들의 존재가 부인된다. 고구려는 태조왕,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 때 사실상 건국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고고관에는 ‘원삼국실(原三國室)’이란 전시실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삼국시대에 대해 “서력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300년경까지 약 3세기간을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삼국은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작은 부락(部落)단위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해당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면 삼국의 유물이라고 하지 않고 원삼국이라고 분류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고고학판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원삼국실로서 아비(삼국)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했던 일제시대가 계속되는 듯한 착각이 인다. 심지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용한 논문은 통과되지 않는 것이 학계의 상식일 정도로 사학계 주류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도그마가 되었다.

삼국사기, 편년체라 조작 어려워

그런데 이런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처음 창안해 낸 인물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다. 그는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硏究:1919)>의 부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에 대한 면밀한 연구 결과 나온 이론이 아니라 일본 고대 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 연구의 부수물로 연구한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쓰다 소키치는 <고사기> <일본서기>의 왜(倭) 관련 기록과 <삼국사기>의 왜 관련 기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둘 중의 하나는 사실과 다르게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다. 쓰다 소키치는 <일본서기>의 14대 쥬아이(仲哀)천황까지는 신화시대의 천황으로 후대인에 의해 조작되었고 15대 오진(應神)천황부터 실재했던 국왕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인데 동일한 잣대를 <삼국사기>에도 들이댔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신화 비슷한 <고사기> <일본서기> 등과 달리 <삼국사기>는 기전체 형식의 편년체 사서이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에서 “<삼국사기> 상대(上代)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기 때문에 왜(倭)에 관한 기재 역시 마찬가지로 사료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하면서도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이라고 생각한다. 쓰다 소키치의 말 중에 핵심은 ‘(<삼국사기>의) 왜에 관한 사료 역시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그가 같은 글에서 “(<삼국사기>에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일본)가 가야를 근거로 신라에 당도했다’라는 명백한 사건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쓴 것처럼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왜가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해야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조선역사지리>에서 “(한반도) 남쪽의 그 일각(一角)에 지위를 점유하고 있던 것은 우리나라(倭國)였다. 변진(弁辰)의 한 나라인 가나(加羅:가야)는 우리 보호국이었고, 임나일본부가 그 땅에 설치되어 있었다”라고 쓴 것처럼 쓰다의 관심은 임나일본부였다. 그래서 쓰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상대(上代)에 보이는 외국관계나 영토에 관한 기사는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라고 비판했다. 임나일본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외국관계나 영토’ 관계 기사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논리 중에는 “혁거세의 건국을 갑자년(甲子年 BC 57)으로 한 것은 간지(干支)의 시작을 맞춰놓은 것”이므로 가짜라는 주장까지 있다. 신라가 갑자년에 건국되었다고 쓴 것이 조작의 증거라는 뜻이니 굳이 반박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열한 수준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하는 일관된 이유는 단 하나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기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나오지 않을 뿐더러 <삼국사기> 기록처럼 한반도 중남에 강력한 고대국가인 신라와 백제가 존재했다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없기에 <삼국사기>를 부정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부정해야 했던 쓰다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이 진수(陳壽)의 <삼국지> 동이열전 한(韓)조였다. <삼국지> 한(韓)조는 ‘마한은 54개 소국,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으로 도합 78개 소국이 있다’고 <삼국사기>와는 달리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수는 이 글에서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고 썼기 때문에 대방군의 위치에 따라서 삼한의 위치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쓰다 소키치는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으며 삼한도 모두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했다. 한반도 남부가 78개 소국으로 나뉘어 있다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말살한 자리를 <삼국지> 한조로 대치시켰던 것이다. 쓰다는 “한지(韓地:한반도)에 관한 확실한 문헌은 현존하는 것으로는 <삼국지> ‘위지’의 한(韓)전과 그것에 인용된 위략(魏略)이 최초의 것으로서 그것에 의하면 3세기의 상태가 알려졌다”라고 <삼국지>가 중국 3세기 삼국시대(220~265)에 대한 기술이니 그 한(韓)조도 당연히 3세기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3세기 한반도 중남부에는 강력한 고대 국가 신라·백제가 아니라 78개 부락(部落) 단위의 소국이 우글대고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은 예(濊)나라를 설명하면서 ‘지금(今)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서기 3세기가 아니라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인 서기전 2세기 이전의 상황을 기록한 구절이다. 물론 3세기의 상황을 기록한 구절도 있다. 이처럼 <삼국지> 동이열전은 진수가 부정확한 전문에 의거했거나 정리되지 않은 사료를 가지고 쓴 부정확한 기록에 불과하다. 해방 후 한국 주류 사학계는 국사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라는 말은 빼버렸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되살려야하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계속 부정하면서 <삼국지> 동이열전을 경전으로 삼는 우를 범하고 있다. 현행 <국사교과서>의 ‘여러 나라의 성장’ 부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삼한’ 순서로 기술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누락시켰다.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의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濊), 한(韓:삼한)’과 같은 순서의 기술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지> 동이열전을 빌미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한 식민사관이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해방된 지 한 갑자가 훨씬 지났지만 대한민국에서 조선사편수회는 과연 해체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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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여왕국 우하량 홍산문화 홍산문화(요하문명)

신비의 여왕국 우하량 홍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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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사람 얼굴 크기로 빚어 만들어진 소조여신상
    우하량 유적 입구 표석
    적석총

    계단식 적석총

    우하량 13지점의 피라미드유적 ( 한 변의 길이가 100m정도로 현재 7층까지 확인되었으며 아직 미 발굴 상태이다)


    석관묘
    중심대묘(옥기묘): 남성인골과 3점의 옥기와 옥저룡 발굴
    봉황과 구름형 옥기
    쌍가락지와 각종모양의 옥기들


    진흙으로 빚은 곰발, 턱뼈, 인체조각상
    오천년을 거슬러 중국내몽골 지역을 답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이곳은 홍산문명(紅山文化) 이후 동이의 근거지로 이 지역에서 발원한 단군조선(고조선)의 건국연대와 깊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홍산문화는 신석기문화로, 내몽고와 요녕성의 접경지역인 적봉(赤峰),조양(朝陽), 능원(陵源),객나(喀喇),건평(建平)등을 중심으로 유적지들이 분포 한다

    신비의 왕국 또는 여왕국이라 불리는 우하량(牛河樑) 유적은 기원전3000~3500년경의 유적으로 거대한 규모의 제단(壇), 여신전(廟),적석총(塚) 3위 일체의 거대 유적을 갖춘 신석기문화로 이미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으며 ‘홍산문화의 꽃’ 이라고 할 수 있다.  

    청동제조도기, 청동슬래그들이 발견돼서 청동기시대에 돌입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특히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하가점 하층문화의 시기는 홍산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후속문화로 단군신화의 건국연대와 거의 유사하며, 문화의 특성 가운데도 유사한 점들이 발견되고 있어 우리로서는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윤석하 (사진작가) 2908y@naver.com

    사진 원본은 http://www.beautia.co.kr/ (昔河사진문화연구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기사입력 2010.01.15 (금) 13:06, 최종수정 2010.01.15 (금) 14:04
  •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홍산문화(요하문명)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출처 : http://www.stb.co.kr/program/info/115/detail.html


 

우리나라는 민족주의의 나라다. 피는 물보다 진한 나라였다. 이런 문화는 본시부터 있었던 것이지 근래에 외국에서 들여온 문화가 아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보면 우리나라에는 본래 圓光法師의 世俗五戒 최치원의 玄妙之道가 있었다고 하는데 忠과 孝 그리고 信이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쳤다. 이것이 우리나라 민족주의 뿌리였다.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세계사의 대세에 어긋나는 것이며 불리하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그렇게 독성이 강한 민족주의가 아니었고 피차 몸에 보약이 되는 사상 내지 종교였다.


우리나라 역사는 단연 민족사이다. 민족사에는 맥이 있다. 맥을 짚어보면 아직은 맥박이 약동하고 있다. 사람의 맥박이 뛰지 않는다면 죽었다고 한다. 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우리민족의 맥박이 약해졌는지 아주 안 뛰고 있는지 진맥해 볼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는 우리 역사의 원동력이다. 맥을 짚어 보고 약하면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아주 정하면 사망진단이 나는 것이다. 만일 죽지는 않았으나 맥박이 약하다면 보약을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주의고 무엇이고 끝나는 것이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민족이란 말에 굶주린 민족이다. 민족의 우리말은 겨레, 민족이 사는 국토의 우리말은 누리.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국가는 나라이다. 얼마나 오래 된 말인가. 그러나 겨레라는 말 가지고는 민족이란 어휘가 갖고 있는 깊은 사연을 알기 어렵다.


애국가에도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란 말이 들어있다. 이 말의 뜻을 잘 새겨 보면 아무리 우리나라를 떠나 외국에 살게 되더라도 대한민국 조국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민족을 피와 역사를 같이 하였고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 하였다.


 내 몸이 남의 몸이 될 수 없듯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남이 세운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가르침)을 배웠고 또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였으나 그들이 합하여 천당을 세워주고 극락세계를 만들어 준다 해도 그 곳이 우리가 세운 나라가 아니라면 나는 절대 그 나라로 끌려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김구는 민족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민족이 없다면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라 없이 산 경험을 가진 민족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주장이다.


민족이라는 자각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이다. 민족의 자각이 있어야 거기서 단결력이 생겨 단합되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살아있다.


 이 지상에는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다. 일설에 6000개나 되는 민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처럼 단일민족국가로서 7000만이나 되는 나라가 없었으니 우리나라는 그 점에서 예외라고 한다. 일본과 중국이 있다고 하나 두 나라는 단일민족이 아니다. 중국은 50이 넘는 소수민족이 있어 전형적인 다민족국가이다.


우리는 단군조선 이후 5000년이나 되는 단일민족국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느 때는 일시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사 속에서 자라나 꽃을 피웠다.

 
1강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 민족 의식이란 무엇인가?
2강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 민족문화 
3강 동방의 등불 코리아 
4강 민족사의 맥을 이은 삼국  
 
 
 

발해연안문명-한국고대문화의 기원


이형구(선문대 역사학과 교수 · 고고학)


 
 

발해연안문명(홍산문명)은 고대 동방문명의 중심


 최근, 중국에서는 만주지방의 고대 문화를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표현하는데, 이형구 교수는 일찍이 발해(渤海)를 중심으로 중국 산동반도 · 요동반도 · 한반도를 포함한 발해연안(渤海沿岸)의 고대문화를 ‘발해연안문명(渤海沿岸文明)’이라 명명하였다. 

 

유럽에서는 지중해(地中海)를 중심으로 서양문명이 탄생한 것처럼 동양문명의 중심발해연안에서 탄생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문명 즉, 이집트문명、그리스문명、로마문명이 일어나 서양문명의 요람이 되었듯이 동양에서는 발해를 중심으로 발해연안의 산동、요동、한반도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보고자 한다.  예전에 동양문명의 중심을 황하문명으로 보았는데, 황하도 발해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발해를 동양의 지중해의 개념으로 보았다.

 여기서 발해연안이라 함은 넓은 의미로 발해를 중심으로 남부의 중국 산동(山東)반도、서부의 하북(河北)성 일대、북부의 요녕(遼寧)성 지방、북동부의 요동(遼東)반도와 동부의 길림(吉林)성 중남부 그리고 한반도를 포함해서 일컫는다.


 한국 민족·문화의 원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까지 60여 년간 중국의 동북지방―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이른바 동삼성(東三省)과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 성과는 시기적으로는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에 이르고 있고, 각 시기마다 중요한 유적、유물들이 수없이 발굴 조사되었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발해연안 동북부、중국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내몽고자치주 동남지역 포함)、길림성、흑룡강성 지방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이다.

발해연안은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 사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하던 지역으로서 우리나라 고대사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형구 교수는 일찍이 ‘발해연안문명’을 탐색하기위하여, 발해연안의 요서 ? 요동지역、만주지방의 구석기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신석기시대 유적、청동기시대 유적 등 고고학적 자료(문헌)를 수집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를 토대로 1982년 6월 25일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논문초고를 발표한 바 있다. 「발해연안 북 ? 동부지구(만주) 구석기 문화」라는 제목으로 1986년 『동방학지』52호에 게재되었다.

 발해연안 북부의 요서?요녕 지방과 요동반도 그리고 길림성과 흑룡강성에서는 한국 민족·문화의 원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었다. 1950년대 이후 30여 곳에서 많은 구석기시대의 문화 유적과 인류화석(人類化石)이 발견되었다...


한국고대문화의 기원에 대해

우리민족과 문화의 원류를 밝히면서 어느 누구도 명확한 해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우리 민족문화의 기원을 찾는 길은 오로지 최선을 다하여 진리에 접근하는 것일 뿐이다. 마치 ‘시지프스(Sisyphus)의 고된 작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고대 우리 민족의 무대와 그 문화의 영역을 오늘날의 한반도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면 그나마도 찾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편 우리 민족문화의 성장과정에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민족문화가 외부로부터 기원하였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것은 한낱 자극 일 뿐이다.  우리는 마땅히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문화의 기원을 찾아나가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동방문명(東方文明)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문명의 중심이 바로 발해연안이라고 하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1강  발해연안문명은 고대 동방문화의 중심
2강  발해연안문명의 빗살무늬토기와 옥문화
3강  홍산문화의 유적과 유물(I)
4강  홍산문화의 유적과 유물(II) -돌무덤과 동이민족
5강  발해연안의 갑골胛骨문화
6강  발해연안문명이 한국고대문화의 원류다
 
 
 
 
우리는 왜 동이를 알아야 하는가?
 
 

1. 우리는 왜 동이를 알아야 하는가?


단재 신채호선생은 “무정신의 역사가 무정신의 민족을 낳으며, 무정신의 민족이 무정신의 국가를 만드니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독사신론(讀史新論)』) 라고 하여 한민족의 민족혼이 없음을 강렬하게 질타하였다.

지금 우리앞에 놓여있는 역사현실은 어떠한가? 중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그 뿌리를 자르려 하고 있고, 한민족 조차도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민족은 모두 단군조선의 후예들이다. 단군조선의 뿌리는 배달민족이다. 배달민족은 바로 ‘광명의 땅 동방에 살고 있는 어진 사람’, 즉 동이족을 일컫는다.

 

2. ‘동(東)’과 ‘이(夷)’ 그리고 동이 개념

 

‘동(東)’: 동이의 동은 해가 떠오르는 방위로 광명을 상징한다. 태양의 본질은 광명이다. 따라서 광명사상은 동이족의 태양숭배사상과 연결된다.

태양을 숭배하는 동이족의 봉(鳳) 토템과 삼족오(三足烏)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개 닭의 무리에 속하는 봉조는 원래 긴꼬리 들닭, 혹은 길들여진 집닭을 말한다. 해가 떠오르면 울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태양이 닭을 불러 깨우거나, 혹은 닭이 태양을 일깨웠다고 여겼으므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고대인들은 태양과 닭류에 대해 숭배하기 시작했고, 양자가 복합된 토템이 탄생되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화학자 왕대유(王大有)선생은 봉황은 동이족의 상징 토템이었으며, 그 원조는 삼족오라고 설명하였다.  삼족오는 태양새로서 동이족의 광명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夷)’: 동이’의 ‘이(夷)’는 ‘활을 사용하는 동쪽 사람’의 의미를 가진다. 후한시대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이에 대해  “동방지인야. 종대종궁(東方之人也. 從大從弓)”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즉 ‘이’라는 것은 대(大), 즉 인(人)을 따르고, 궁(弓)을 따르는 것으로, 동이는 활을 쏘는 동쪽 사람이란 뜻이다. (금문의 夷는 바로 서있는 사람 뒤에 활(弓)이 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夷의  금문]

‘동이족(東夷族)’은 ‘동쪽에 있는 이 즉 활을 잘 쓰는 족속’이란 뜻이다. 이는 당시 동북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기마민족의 문화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다음으로 ‘이’는 ‘신을 대신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신성한 종족을 뜻한다.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서 ‘이’는 사람이 단정하게 윗사람에게 예를 표하듯 서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夷의 갑골문, 금문]

특히 상대에 동이는 ‘인방(人方)’, ‘시방(尸方)’이라 불려지기도 했다. 이때 ‘시(尸)’는 단지 주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사 때 신이 응감하도록 앞에 세워놓은 시동, 신상으로 ‘신을 대신하는 사람, 신의 대리인’을 뜻한다. 이것은 당시 동이족이 얼마나 신성한 종족으로 비쳤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이’는 ‘인(仁)’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동이’는 동방에 살고 있는 ‘어진 사람(仁者)’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이의 옛 글자는 이()라 하는데 이()는 인야(仁也)라고, ‘어질다’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이’가 ‘어진 사람’을 뜻하고 있음은 『후한서』「동이열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한서』「동이열전」에서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을 이라 한다.’ 이는 근본을 말한다. 그 의미는 이가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해 만물이 대지로부터 솟아나오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동이족이 군자국의 주체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이’의 ‘이(夷)’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 중심적인 의미는 ‘ 활을 사용하는 동쪽 사람’, ‘신을 대신하는 사람’, ‘어진 사람(仁者)’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동이는 동쪽의 활을 쓰는 어진 사람이란 의미로 우리 민족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3. ‘동이’의 의미 변화


‘동이’가 어떻게 해서 변방의 오랑캐로 폄하되었을까?

동이가 오랑캐의 호칭으로 불리워지게 된 배경으로 화하족과 동이족의 정치적 대결을 들 수 있다. 이 대결은 대략  4700년 전 중국 사람들이 그들 민족의 시조로 삼아 온 황제 헌원과 치우천황과의 탁록대전으로 시작된다.

 

치우천황은 신농씨의 마지막 임금인 유망 때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유망을 추방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쳤다. 이 때 헌원이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치우천황에게 도전하였다. 이에 치우천황은 헌원과 10년동안 73회의 전투를 해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여기서 황제헌원과 그 족속(화하족)은 치우천황과 그 족속(동이족)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물론 그 후손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치우와 동이족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품고 2300여년을 흘러 진시황까지 내려오게 된다.

 

진시황에 이르러 강력한 힘을 길러 동진을 거듭하여 중국대륙 전체를 그들 화하족의 확실한 터전으로 만드는 전국 통일을 달성하고, 동이족을  변방으로 밀어내거나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동화시켜 통일제국을 이룬 것이다.


특히 한무제 때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를 저술하면서 동이족 역사의 뿌리부터 왜곡하였다. 사마천은 탁록 대전의 역사를 날조하고 치우천황의 존재를 왜곡하였고, 중국이 천자국으로서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관을 만들어 내었다.

한나라 이후 쓰여진 사서에 나오는 동이는 전국시대까지 동방족을 뜻하는 ‘동이’와는 달리 ‘동쪽 오랑캐’란 뜻으로 비하되었다. 즉 당시 동이와 같이 사이(四夷)라고 불리웠던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같은 오랑캐의 맥락으로 동이라 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우리 역사상에 동이라는 표현이 우리 민족에 대한 표현으로 수용된 것은 조선시기에 이르러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동이의 의미와 내용은 중국인의 관점에서 중화에 대비되는 오랑캐나 주변국에 대해 폄하하는 표현과 함께 우리 민족에 대한 통칭적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중기의 실학자들에 의해서 동이는 화하에 대응하는 동등개념으로 인식하는 상황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실학자들은 동이의 중심거점이 요동지역이었으며 단군으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이 이들 동이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입장은 민족주의사학, 재야사학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동이족 역사는 그 뿌리부터 왜곡되었다.

중국은 사마천의 탁록대전 왜곡부터 지금의 동북공정까지 한민족 고대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음모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중국이 이렇게 역사왜곡을 자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켜 천자국의 종주권을 찬탈하려고 끊임없이 역사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측의 역사왜곡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우리의 뿌리역사를 상실함은 물론 민족 정체성까지 상실하게 될 것이다. 지금 국내 학계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가 틀리다는 소극적인 주장이 나오기는 하지만 전 국가적 역량을 발휘하여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4. 동이와 동방의 뿌리시대 국가


동방의 뿌리시대 국가로 환국-배달-조선으로 이어지는 삼성조시대가 존재하였다.

환국은 전 인류의 뿌리국가이면서 우리 한민족의 뿌리나라이다. 왜냐하면 환국 - 배달국 - 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을 보통 동이족의 중심 세력이라 하며, 이들 삼성조는  동이족의 종통을 이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동방의 뿌리국가는 모두 광명사상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환국의 ‘환’은 하늘의 광명을 말한다.

 

환국의 종통을 이어 받아 새로운 문명을 개척한 국가는 광명의 나라 배달이다. 

배달은 광명을 의미하는 ‘밝’과 땅을 의미하는 ‘달’의 합성어로서 태양이 가장 먼저 비추는 밝은 광명의 동방 땅을 의미한다.

 

배달국은 환웅 18세에 전체 역년은 1565년에 이르렀다. 배달국이 넓은 중원 땅으로 그 강역을 확장하자 결국은 서방의 한족과 동이족은 영토분쟁 및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 헌원과 치우천황은 10년 동안이나 전쟁을 하였고, 결국 치우천황은 탁록 대전에서 황제를 굴복시켜 중원의 패권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단군왕검은 18세 환웅 말엽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그 혼란을 바로잡고 배달국을 계승하여 고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 전의 일이다.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이다.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동이족으로 당시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다.

 

단군조선 또한 배달의 광명사상을 이어받아 광명에 비친 동방의 땅을 상징한다.

환국(7대 환인 3301년), 배달국(18대 환웅 1565), 단군조선(47대 단군 2096년), 이것이 동방한민족의 뿌리국가인 삼성조시대이다.


5. 동이문화의 중심무대


동이문화권은 중국 대륙에 폭넓게 분포하는데, 대표적인 지역으로 요령일대와 산동일대의 2대 중심지로 나눌 수 있다.

고대에 있어서 동이족의 활동무대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좁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동북아 대륙의 문명중심지를 포괄한다.


동이족의 발상지는 지금의 바이칼호 일대로, 그 후 점차 남하하여 요령성 서부에 와서 한 갈래는 동북으로, 다른 한 갈래는 발해를 따라 산동반도로 진출하였다.


1) 요령일대를 중심무대로 삼은 동이족

 바이칼호에서 남하한 동이족이 요령성 서부에 정착해 배달국 시대의 홍산문화를 이루어 냈다.

동이족의 종족 중에서  후에 우리 민족을 형성하는데 주류가 된 것은 예맥족와 한족(韓族)이었다.

예맥족은 넓은 의미에서 동이족이며, 맨 먼저 요령 일대에 터전을 마련하여 한층 진보한 문화를 마련했던 민족이다. 예맥족에서  예족은 농경생활을 영위해왔던 선주민들이고, 맥족은 유목적 기질을 지닌 이주민이다. 예맥족은 발달된 농경문화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먼저 홍도 계통의 문화와 그 종족들을 흡수하여 보다 넓은 문화기반을 만들면서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예맥족(濊貊族)은 배달국과 후에 고조선을 이룬 중심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산동일대를 중심무대로 삼은 동이족

동이족은 초기에는 구려(九黎)라 하였고, 4700여년 전 배달국 14대왕 치우천황의 전성시대부터는 치우족, 삼묘족(묘만족)이라 불렀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族) 등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성,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 역사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복희·신농·치우 등이 있다.


먼저 복희는 주역의 창시자이자 인류문명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으로 8괘를 그려 역학을 창시했고 인류가 우주의 실체와 변화원리를 알 수 있게 한 분이다. 이 역학이 서양에도 전해졌고 피타고라스에게도 영향을 주어 수학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는 서양학자의 연구결과도 있다. (『낙서의 유산』)

복희는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무늬에서  하늘과 땅의 생명의 율동상을 깨닫고 이를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것이 바로 하도(河圖)이다.

의약과 농경의 창시자인 신농(神農)은 천수(天水)지방에서 출생하여 강수(姜水, 섬서성 기산현) 땅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곳의 지명을 따서 성을 강(姜)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신은 호남성 차능현에 묻혔다고 한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지도자이다. 여기서 치우는 동이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묘만족의 지도자이기도 하니, 구려가 동이의 대표 부족이었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묘만족 연맹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치우가 중원을 개척하여 넓힌 뒤에 그 땅을 청구국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중심은 지금의 산동성 지역이었다.


동이족들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동해안 일대, 남만주. 발해만 일대, 한반도 북부에 걸쳐서 거주하면서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을 형성하고 있었다. 적어도 발해만을 끼고 도는 중국 동북지방, 즉 지금의 산동성, 요령성 지방은 동이문화권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동이족은 대륙의 주요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복희로부터 신농, 치우에 이르기까지 동이족에서 천하를 호령하였던 위대한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제5의 문명’ 요하는 ‘중화’역사엔 없었다 홍산문화(요하문명)



‘제5의 문명’ 요하는 ‘중화’역사엔 없었다

[한민족 시원, 만주]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1)
용 옥 토기 주거지 등 중국문화 최초 상징 뿌리
BC 6천년 한반도-요하 단일 문화권, 유물 증거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등의 터전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에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한겨레>는 법륜 스님 등 다섯 명의 특강 내용을 11차례로 나눠 영상과 함께 <인터넷한겨레>에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최근에 요하문명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년 8월29일 방영)이 방송된 뒤에 많은 사람한테 전화를 받았다. 어떤 역사 교사가 전화를 해서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되느냐”고 묻더라. 아직 역사 교과서에는 단군이 신화로만 나오는데, 단군의 실체에 대해 학생들이 물어보고, “요하문명이 우리 문화와 연결돼 있는데, 왜 우린 그런 것을 배우지 않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혼란스럽다고 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모르고 어떤 기록에도 없는 새로운 문명이 발견되었으니까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500년 앞선 하모도문화 발견에 중국이 난리 나 기원론 수정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문명뿐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장강하류에서 하모도문화라고 명명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앙소문화(황하문명의 중심적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랑캐 땅’의 앞선 문명인 옥기시대에 중국 더 큰 혼란…세계도 깜짝

장강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학계의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차피 중국 땅에 있으니까….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게 요하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인식 속에 요동, 요서, 만주를 생각하면 말 달리던 선구자 생각나고, 수렵·목축하는 유목민을 떠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새로운 신석기 유물이 계속 나오니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3,000년) 단계에 오면 이미 초기 문명단계,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문명이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그 문명단계가 성립할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동기가 나오든지, 문자가 나오든지, 권력분립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징표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홍산문화 시기에서는 청동기나 문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나 문자가 없는 문명단계, 국가단계는 세계 역사에서 많다. 단적인 예로 몽골제국은 전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지만 문자가 없었다. 제국 형성 이후에 필요에 의해서 새롭게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했던 타제석기, 마제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 구분은 동북아시아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북아시아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타제석기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간에 옥기시대를 새롭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순에 빠진 중국이 역사 재편 작업 들어간 것이 동북공정

이렇게 신석기 문화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은데, 발굴하고 나니까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인 황하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나오니까….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문명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요하 일대는 원래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제가 활동하던 곳이고, 황제가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고 내려오면서 또 중원에서 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요하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소수 민족은 모두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일부 학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논문들이 요하문명을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와 연결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한 동북공정 때문에 말이 많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공정이 아니다. 동북공정의 진짜 의도는 동북지역의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전부 중국사로 만들려는 것이다. 신화부터 시작해서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고조선, 단군, 해모수, 주몽 전부 다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황제의 후예인가? 단군의 후예인가? ‘그래 너희는 단군의 후예인데, 단군이 바로 황제의 후예다.’ 이런 논리로 가고 있다. 지금, 요하문명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하문명 세력이 진짜 중국 황제의 후손이었나?

자 그럼 이 지역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사진 자료 중심으로 보여주겠다. 그 문명의 주도세력은 누구였는지? 진짜 황제의 후손이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요하문명은 요하를 끼고 형성된 문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하 상류는 내몽고자치구의 동북쪽에서 랴오닝성 발해만에 이르는 큰 강으로 수많은 지류를 지니고 있고, 이게 발해만으로 흐르는데 ‘ㄱ’자 모양이라고 보면 된다. 요하를 중심으로 신석기 문화인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 분포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동석병용시대는 소하연문화(기원전 3,000~2,000년)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년부터)를 거쳐 고급 문명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지명을 따 붙인 것이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홍산문화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지역이 500곳이 넘는다. 한 예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인근 오한치박물관에 가면 하가점-하층문화가 발견된 지역만 2천 곳이 넘는다.

 

 

중국 본토에선 없던 고조선 상징 비파형동검, 한반도에선 무더기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다.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다. 요하문명이라고 하면 소하서, 흥륭와, 사해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문명단계로 진입하는 시기가 홍산문화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친다. 홍산문화가 요하문명의 꽃이라면 우하량 유적지는 홍산문화의 꽃이다. 여기서 제단터와 여신상 등 홍산문화를 상징할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자가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동검이 대량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폭넓게 발굴이 되었고, 산둥반도에서 1~2개가 나온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중국 본토나 다른 곳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에서 발견된 주요 유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자.

 

 

세계 최초 요하 옥기와 비슷한 유물 전남 여수에서도 발굴

» 흥륭와문화의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 발굴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흥륭와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옥기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다. 이들 유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에서 나온 옥 귀걸이(사적 426호). 기원전 6,000년 이상으로 연대가 추정된다. 우실하 교수 제공
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다. 그의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

한반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 전남 여수시 안도패총유적에서 나온 귀걸이와 발굴 당시 사진. 안도패총의 귀걸이는 화산지역에서 나오는 흑요석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장강하류를 통해서 보다는 백두산 지역에서 백두대간 동쪽 동해안을 통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해안의 흑요석은 일본 화산지대의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성분 분석이 필요하다.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역사적 상식을 깬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

흥륭와문화지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중국 전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집단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놀랍게도 해자 혹은 환호(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주거지 주변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판 것)가 있는데, 폭이 4m, 깊이가 2m나 된다. 여기에서 15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주거지가 흥륭와 일대에서 3곳이 발굴되었다. 해자나 환호는 적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때부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불에 탄 조와 기장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야만인의 땅이라고 믿어온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6000년에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상식을 깨는 것이다.

»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 아래 부분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곳이 해자 혹은 환호이다. 우실하 교수 제공

» 흥륭와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기원전 6천 년 이미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

위 사진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7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4,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 사해문화시대 집단 주거지인 요하제일촌(사진 위)와 마을 한가운데 돌로 쌓은 용 형상물(사진 아래). 중국 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우실하 교수 제공

사해문화는 흥륭와문화 보다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연대는 거의 비슷하다. 두 문화가 비슷해서 보통 사해-흥륭와문화 또는 흥륭와-사해문화라고 함께 부르기도 한다. 사해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요하제일촌이다. 이 집단 주거지가 발견돼 사해문화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여기도 해자 혹은 환호가 있고, 100여 가구가 살았다.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용 모양의 조형물이다. 주먹보다 조금 큰 돌을 쌓아서 용 형상물을 만들었다. 길이가 19.7m, 폭이 넓은 곳은 2m, 좁은 곳은 1m다. 중국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사해유적에서는 용문 도편도 나온다. 뱀이 똬리를 튼 그림이 새겨진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게 용에 대한 최초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조보구문화 시대에는 최초의 봉황이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께 새 형상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중화제일봉’이라고 부른다.

 

채색 토기, 황하문명은 서역 전래설…요하문명은 독자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보구의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 존형기다. 그릇 형태가 특이하고 매우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앙소문화에서 채도는 아주 넉넉하게 잡아도 기원전 4,500년인데, 조보구의 채도는 앙소문화보다 최소한 500년이 더 앞선 것이다.

앙소문화의 채도는 단순 기하문이거나 고기나 사람 얼굴을 그렸다면 조보구의 채도는 디자인이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채도를 평면으로 펴보면 현대적 디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기에 사슴, 돼지, 새 등의 머리를 한 용이 그려져 있다. 녹수룡, 저수룡, 조수룡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조보구문화 시대에 신성시 했던 주요 토템 동물들일 것이다.

» 조보구문화 소산유적 존형기의 신령도안. 우실하 교수 제공

채도 존형기가 의미하는 것은 요하문명이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하문명을 대표하는 앙소문화의 채도가 서방에서 전래했을 것이라는 ‘채도서역전래설’이 세계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앙소문화 채도와 거의 똑같은 것이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발견된다. 지금까지는 채도가 서방에서 들어와 앙소문화 지역을 거처서 요서 지방 일대로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보구 채도가 그릇의 모양도 다르고 50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을 보면 새로운 유입 루트를 상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늘날 중국문화를 상징하는 최초의 옥, 최초의 용, 최초의 주거지, 최초의 토기, 최초의 치아 수술 흔적 등이 모두 요하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실하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pjc@hani.co.kr

우실하 교수(사진)는=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수. 중국 요녕대학 한국학과 교수 역임. 문화사와 사상사, 문화종속론, 문화이론, 동양사회사상 전공. 주요 저서로 ‘오리엔탈리즘의 해체와 우리 문화 바로 읽기’(1997), ‘전통문화의 구성원리’(1998), ‘동북공정의 선행 작업과 중국의 국가전략’(2004) , ‘전통음악의 구조와 원리’(2004),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 등 7권의 단독 저서와 ‘고대 동북아 연구’(2008), ‘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2008) 등 8권의 공저가 있다. 우리민족의 문화와 사상의 원류를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고, 상고사를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남다르다. 홈페이지 www.gaonnur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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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정통맥을 바로잡아주는 단군세기 북부여기 삼성기 환단고기 출간

한민족의 정통맥을 바로잡아주는 단군세기 북부여기 삼성기 환단고기 출간



상생출판에서는 동방 한민족 국통맥을 바로 잡는 고대사서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이미 2009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독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은 바 있는 『삼성기(三聖紀)』를 시작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전권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그 두 번째, 세 번째 책으로 『단군세기』, 『북부여기』를 출간하였습니다. 중화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채 신화로 망각, 축소되어 있는 고조선의 역사와, 한민족 고대사와 중세사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인 북부여의 바른 역사를 통해, 동방 광명문화의 뿌리인 한민족의 진정한 정신세계와 참 역사를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행촌杏村 이암 찬撰 │ 안경전安耕田 역주譯註

*아래 내용은 역자譯者 서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고조선이 한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의미


고조선은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신시 배달국의 국통을 이어받은 나라이다. 요순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2333년부터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238년까지 무려 2096년의 역사를 내려오면서, 마흔 일곱 분의 단군이 다스려왔다. 고조선의 지배하에 있던 제후국들은 70여 개 국에 달하였다. 오늘날의 한반도와 만주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본토 깊숙한 곳까지 통치권이 미쳤던 동방의 대제국이었다.

또한 고조선은 우주의 주재자인 삼신상제님을 신앙하고 신교神敎를 발전시켜 왔다. 삼신상제님에 대한 제천의식은 말할 것도 없고 신교에 토대를 둔 우주관과 인간관 및 역사관을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고조선은 요임금의 당나라, 순임금의 우나라, 그 후의 하은주 3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상제문화와 신교의 생활문화를 전수해 준 동방의 문명국이었다. 상제님께 올리는 천제문화, 치수治水법, 책력, 금속무기, 문자제도, 천자제도 등을 전해주었다. 중국의 황하문명은 고조선으로부터 문명전수가 없었더라면 탄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방 문명의 중심국가인 고조선이 기원전 5세기에 들어서면서 쇠락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마지막 임금인 47세 고열가 단군때 해모수라는 인물이 출현하여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북부여를 창건했다. 이후 고조선 영역 내에서 북부여, 마한, 진한, 변한 등 고조선의 여러 계승국가들이 등장했고 그 가운데서 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도 나오게 되었다.
고대 일본의 첫 국가로 일컬어지는 야마토 정권도 부여에서 나왔다.


요컨대 조선은 고대 한민족의 열국들과 일본 등을 낳은 모태였을 뿐 아니라 중원 땅에 신교문화를 전파한 동방의 뿌리국가였다.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 찬撰 │ 안경전安耕田 역주譯註

*아래 내용은 역자譯者 서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북부여기』의 의의


『북부여기』는 고조선이 망한 후 열국시대로 옮겨가면서 복잡하게 전개된 우리 역사의 국통맥을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기존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과 부여를 계승관계가 아닌 별도의 연원을 가진 국가로 생각하였으며 삼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였다. 이런 면에서 휴애거사 범장이 쓴 『북부여기』는 모호함 속에 감추어져 있던 북부여와 고구려, 동부여, 삼한의 연원을 드러내어 우리 동방역사의 뿌리를 밝혀주는 대단히 귀중한 기록이다.


한민족 9천년 역사에서 가장 복잡한 국통 내용이 바로 부여사의 맥이다.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의 성립 이전인 열국분열시대, 즉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시대의 약 200년 기간이 우리 한국역사에서 공백의 상태로 남아있다. 가장 알기 어렵고 복잡한 전환기적 시간대가 바로 이 시기이다.


삼국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고리인 북부여, 열국분열 시대의 역사가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이 왜곡 말살되고,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고리를 『북부여기』에서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동방 한민족의 상고 시원역사 시대와 삼국시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이 '부여사의 기원과 맥'을 밝혀주는 범장의『북부여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한민족 국통의 체계'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성기 http://www.yes24.com/24/goods/3414814?scode=032&srank=1

다른 책은 곧 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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